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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의 거울 앞에서 / 이경구

등록날짜 [ 2018년12월09일 14시47분 ]

[이경구 칼럼]

역사의 거울 앞에서

 


옛말에 사감(史鑑)이란 말이 있다. 사(史)는 ‛역사’, 감(鑑)은 ‛거울’이란 말이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일은 되풀이하지 말라는 뜻이다. 전철(前轍)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페르시아 전쟁을 다룬『역사(The Histories)』라는 책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Herodotus)가 기원전 5세기에 쓴 인류 최초의 역사서다. 거기에는 “평화 시에는 자식이 아버지를 묻고 전시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묻는다 (In peace, sons bury their fathers. In war fathers bury their sons.)”는 명언이 나온다.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라는 동양 최고의 고전을 썼다. 그 책에는 “전사지불망(前事之不忘) 후사지사야(後事之師也)” 라는 고사 성어가 있다.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나중 일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경험과 역사는 새 역사 창조의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선생님이 ‛征明假道’라는 말을 칠판에 쓰고, 그 뜻을 공부해 오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외교관직을 정년퇴직하자, 유유자적(悠悠自適)을 즐기며 우리나라 외교의 흔적을 찾았다.

 

1592년 임진년(선조 25) 4월에 일본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明)나라를 칠 터이니 길을 비켜 달라는 구실로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서애(西厓) 유성용(柳成龍)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에 보면, 선조가 받아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서(倭書)에는 ‛솔병초입대명(率兵超入大明)’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어전에서 서인(西人)이요 정사인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은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동인(東人)이요 부사인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은 병화의 징조가 없다고 하였다. 통신사들의 엇갈린 보고는 조정이 유비무환을 하지 못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징비록』은 후세들이 후환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 저자가 쓴 임진란의 역사다.

 

시인 이은상(李殷相)은 1982년 3월에 발행한 역저 『이순신(李舜臣)』에서 “그(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찌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우리에게로 보내어 우리의 실정을 조사케 하는 한편…쓰시마 (對馬島) 성주 무네 요시도모(宗義智)와 중 겐소(玄蘇) 들을 보내어, 계속해서 우리 실정을 샅샅이 알아 가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에서 조총을 보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 군기고(軍器庫)에 넣어 둘 따름, 새로 보는 그 같은 무기를 연구해 볼 생각은 꿈에도 안 가졌던 것이다.” 라고 당시의 국내 실정을 밝히고 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李御寧) 박사는 1999년 4월에 출간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에세이집에서 임진왜란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눈치가 발달한 민족이다.

 

‛눈치만 빠르면 절간에서도 새우를 얻어먹을 수 있다’는 속담도 있다. …만약 그때 눈치가 아니라 과학적 판단에 의해서 그것을 처리했던들 임진왜란이라는 처참한 전화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명나라 군사를 미리 주둔시킬 수도 있었겠고, 혹은 순순히 길을 빌려 주어 오히려 어부지리를 볼 수도 있지 않았나 싶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백 년이 훨씬 지났지만, 우리나라 학계에는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외환인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 인식을 놓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전권 대관 신헌(申櫶)과 미국의 전권 대신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이 1882년(고종 19) 5월에 제물포 화도진에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 문서는 화문(華文)과 영문으로 쓰여 있다. 화문본에는 “만약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으로부터 불공 경모(不公輕藐)를 당하여 이를 알리는 경우에는 타방은 필수 상조(必須相助)하고 조정하여 우의를 표한다.”는 말이 나온다.

 

1996년 3월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고등 학교 국사(하)』의 「근대 사회의 발전」에 보면,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조선이 서양 여러 나라와 맺은 최초의 조약인 조 ∙ 미 수호 통상 조약에서는,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의 압박을 받을 경우에 서로 돕고 거중 조정을 한다고 규정하였다.” 조선과 미국이 상호 원조 조항이 들어간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는 말이다.

 

박동진(朴東鎭) 전 외무부 장관이 2001년 <외교> 10월호에 기고한 「朝鮮策略 이후」라는 글에는 이런 말도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조미 수호 조약은 제1조가 양국의 국가 안보를 위한 상부상조에 대해 언급했다는 사실이고 이 고귀한 정신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확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현재의 주한 미군은 미국의 대한 방위 공약의 구체적 표현이다.” 조미 수호 조약의 상부상조 조항이 인연이 되어 한미 양국이 상호 방위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서로 돕고’와 ‛상부상조’라는 말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화문본(華文本)에 나오는 ‛必須相助’를 지칭하는 말이다. 영문본에는 ‛必須相助’라는 말이 없다.

 

1965년 6월에 도쿄에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체결한 첫 번째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작성되었다. 해석에 상위가 있으면 영어본에 따른다고 하였다. 한일기본조약 제1조는 “양 체약 당사국 간에 외교 및 영사 관계를 수립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대사급 외교 사절을 지체없이 교환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또한 양국 정부에 의하여 합의되는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이다.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이다. ‛이미 무효’라는 말은 조약 교섭 때 논란의 대상이었다. 전 외무부 장관 이동원의 후일담에 따르면, 한국측에서는 ‛무효(null and void)’라는 문구를 주장했는데, 일본측이 그 앞에 ‛already’라는 낱말을 넣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해서 조약에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말을 넣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도 1965년 6월에 도쿄에서 조인되었다. 이 협정 제2조 1항의 내용은 이렇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 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협정 제2조의 1항이 국민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 이듬해 1966년 10월에 아내를 대동하고 버마 (지금의 미얀마)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부영사로 부임하였다. 어느 가을날, 버마 신문 기자들을 랑군(지금의 양곤) 시 프롬 가 18번지 B의 집으로 초대해서 만찬을 베풀며 우의를 다짐하는 자리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 1항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구절에 대해 토의하였다. 기자들은 자기네 나라가 일본과 맺은 배상 협정에도 그런 조항이 들어 있다고 말하고, 국민의 재판 청구권을 침해하는 협정에 굴욕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들(comfort women)이 랑군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후 2005년 2월에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이춘식 등 4명은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1억 원씩의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 14년 만인 2018년 10월 30일에 대법원 전원 합의체는, 7명의 다수 의견으로 이춘식 등 4명이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신일본제철이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 지급하라고 한 원심을 확정하였다.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은 2명이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원고들이 구하는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일본 당국은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 협정에 반한다고 하였다.

 

2015년 1월 14일 수요일, 아내와 함께 우리 밀러스 크리크 마을에서 가까운 사우스센터의 AMC 극장에 가서 영화 「UNBROKEN」을 보았다. 영화 제목이 「꺾이지 않은 자」이다. ‛THE UNBELIEVABLE TRUE STORY’라는 자막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믿기지 않는 실화’라는 말이다. 1943년 5월 27일, 미국 폭격기 한 대가 태평양에 추락하여 잔해만 남긴 채 사라졌다. 목숨을 건진 사람은 루이스 잠페리니 중위와 두 명의 동료였다. 구명보트에 몸을 싣고 맨손으로 물고기와 상어를 잡아먹으며 연명하였다. 동료 한 명이 죽자 남은 동료들이 수장하였다. 구명보트를 타고 47일을 버티던 날, 일본 함정에 발각되었다. 그들은 마셜 군도로 끌려갔다가 일본 본토로 이송되었다.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850일간 고문, 구타, 굶주림, 등 지옥 같은 포로 생활을 겪었다.

 

미국 작가 로라 힐렌브랜드는 주인공 루이스와 75회의 인터뷰를 가졌으며 7년 동안 원작 『UNBROKEN』을 집필하여 2010년에 출판하였다. 원작에 보면 영화에서 빠진 일본군의 만행은 다음과 같다. 일본 함정 밀실에 갇혀 있던 어느 날, 루이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 고위 장교가 루이스에게 “미국 군인들은 성욕을 어떻게 만족시키는가?” 라고 물었다. “만족시키지 않고 자제력에 의지한다.”고 루이스가 답하였다. 일본군 고위 장교는 일본 군대가 납치하여 성노예로 삼고 있는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여자들이 수천 명이라고 하였다. 한국인 5천 명을 사이판 인근의 티니안섬으로 끌고 와서 강제 노역을 시키고 있다고도 하였다. 전쟁이 불리해 보이자 일본인들은 살해 명령에 따라 한국인 5천 명을 모두 죽였다.

 

윤병세(尹炳世)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은 2015년 12월 28일 서울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합의했다고 발표하였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발표문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표명, 발표, 조치를 평가하고 일본 정부와 함께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가 착실히 이행된다는 전제로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번 문제에 대해 상호 비판을 자제한다.…”는 구절이 있다.

 

기시다 일본 외무상도 발표문에서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이 간여한 문제로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아베 총리대신은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깊은 사죄를 표명한다. 일본 정부는 이번 발표를 통해 이번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 일본 정부는 유엔 등 국제 사회에서 본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자제한다. 앞서 말씀드린 예산 조치에 대해서 규모로는 10억엔 정도 산정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합의 내용을 듣고 회상에 잠겼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안내를 받아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호소하였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도 요청하였다. 시위에는 시민들이 참석하여 많은 격려를 보냈다.

 

2004년 3월 17일 수요일, 수요 시위가 600회를 맞이하였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 배상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일본 정부는 희생자들을 위해 위령비를 세워라!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 정책을 수립하라!”고 외쳤다. 굳게 잠긴 일본대사관의 철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수요 시위가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일본대사관 앞쪽 보도에 평화의 소녀상이란 동상을 세우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시위를 벌였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부도 외교적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외교부 장관과 일본 외무상의 기자 회견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시위 목적이 명예 회복에 있음을 간과한 것 같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였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합의한 역사적 선언문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소견을 말하고 싶다.

 

판문점 선언문을 읽고 첫 번째로 느낀 점은 아래와 같다. 선언문 3항에는 “남과 북은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앞으로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2006년 10월에 북측은 핵실험을 감행하였고 이듬해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시험 발사도 성공하였다. 핵무기를 가진 북측의 모습에 남측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평화 시에는 자식이 아버지를 묻고 전시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묻는다”고 하였다. 판문점 선언문에 북한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느낀 점은 이렇다. 양 정상은 선언문 1항에서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10 ∙ 4 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나가며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여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들을 취해나가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북이 먼저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를 도입해야 한다.

 

세 번째로 느낀 점은 판문점 선언문에는 그 외에도 뜻이 분명하지 않은 구절과 낱말이 있다. 남과 북이 판문점 선언문을 협의하고 이행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점이

드러날 소지가 있다.

 

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을 진행하고 ‛9월 평양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평양 선언문의 서론에 해당하는 대목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양 정상은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 당국 간 긴밀한 소통, 다방면적 민간 교류와 협력이 진행되고,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획기적인 조치들이 취해지는 등 훌륭한 성과들이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평양 선언문의 본문은 판문점 선언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가는 날, 내가 TV를 켰더니 연도에 길게 늘어선 인파가 인공기와 한반도 지도를 그린 깃발을 양손에 들고 흔들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환영하는 광경이 화면에 나타났다. 숲은 멀리서 봐야 잘 보인다고 하던가!

 

 

□ 이경구 
前 외교관.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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