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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피천득의「인연」을 다시 읽고 / 이경구

등록날짜 [ 2019년02월02일 20시12분 ]

 

[이경구 칼럼]

피천득의「인연」을 다시 읽고 

 


  내가 서재에 앉아 피천득 수필가의 「인연」을 처음 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이다. 외무 공무원을 정년퇴직하던 해 여름 수필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본보기로 삼았다.
  지은이는 서두를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주인공 미우라 아사코(三浦朝子)가 어렸을 때 다녔던 성심여학원  소학교와 이름이 같다. 출발이 매우 청신해 보였다.
  나는 다음 글이 어떤 내용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본문은 피천득 수필가가 아사코와 세 번 만나고 헤어진 사연을 추억하는 글이었다. 지은이 특유의 정서와 문체를 느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동경에 가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성심여학원(聖心女學院) 소학교 일 학년인 딸 아사코(朝子)가 살고 있었다. 아사코는 ‘스위트 피’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 책상 위에 놓았다.  ‘스위트 피’는 아시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생 부인은  “한 십 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 하였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데르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아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어느 봄날 두 번째 동경에 가서 동경역 근처에 여관을 정하고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성심여학원 영문과 삼 학년이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청순해 보이는 그녀는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 대전과 우리나라의 해방과 한국전쟁이 있었다. 나는 아사코가 전쟁 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죽 지붕에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꼬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이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독자인 나는 이런 대목을 읽고 수필의 진수를 맛보는 것 같았다. 지은이의 추억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더니, 아사코가 선물로 동화책을 받은 것은 뜻밖에 그녀가 성심여학원 소학교 일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린 소학생이 17살인 지은이에게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같은 어른스런 말을 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선생 부인이 “한 십 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 라고 했다는 말도 믿기가 어려웠다. 일본인은 본심을 잘 토로하지 않는다.
  지은이가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라고 쓴 것도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미우라 선생 부인을 만나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아사코를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는 언행도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뽑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내게는 아사코의 남편은 지은이가 상상한 것과 같은 사나이였다는 설명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사코의 남편에 대한 선입견은 정서적인 문맥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녀와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아픔을 말하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대목도 군더더기가 아닐까 싶었다.
  지은이는 마지막에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마무리가 아주 명료해 보였다. 지은이의 외우 윤오영(尹五榮)은 『수필문학입문(隋筆文學入門)』에서  “간명하게 쓰되 정서의 함축이 있으면 좋은 글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혜문서관이 펴낸 『중고생이 꼭 알아야 할 한국 수필 60』에 보면 피천득의「인연」에 대한 해설 속에 이런 말이 있다.  “표현에 있어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점강법의 사용이다. 우선 ‘아사코’라는 인물을 보면 꽃에 비유되고 있는데, ‘스위트 피’, ‘목련’, ‘시드는 백합’ 등 그 신선함과 아름다움이 점점 감소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지난해 추석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서울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 3층 민속관으로  여름에 개관한 금아피천득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니, 선생의 사진과 금빛 동상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넓지 않은 방에는 선생이 쓰던 파이프, 안경, 여권, 노트, 저서, 책상, 침대, 인형 따위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선비의 욕심 없는 마음을 풍기고 있지 않은가. 
  그다음 날 서재에 앉아 피천득의 「인연」을 다시 읽어 보았다. 춘천의 성심여자대학 출강으로 시작되는 도입 부분, 지은이가 아사코를 세 번 만나고 헤어진 일을 회상하는 본문,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겠다는 마무리의 전편에 깔린 정서 역시 선비의 욕심 없는 마음이다.
  나는 그런 마음이 피천득 수필의 특성이요, 「인연」은 지은이가 그런 바탕 위에 잘 짜인 얼개와 평이한 글로 빚은 수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첫 독후감은 바뀌지 않는다. 
 

 

□ 이경구 
前 외교관.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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