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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미 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 장종권

등록날짜 [ 2019년02월15일 20시55분 ]

[장종권 칼럼]

이미 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쏜 화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화살의 방향을 되돌리거나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목표한 과녁에 정확하게 맞느냐 맞지 않느냐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과녁에 맞는다 해도 그 과녁 자체가 얼마든지 허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살을 쏘는 재미로 인생을 산다. 화살을 쏘아대는 현실과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세상의 발전과 변화는 이 쏘아대는 화살 중 어느 지점이었으리라는 생각도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믿는 과녁이지만 그 과녁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동시에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래도 화살은 쏘아야 하고 쏘게 되어 있다. 쏜 화살은 지금으로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소소하거나 거대하거나 어떤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 과녁을 향해 무수한 화살을 쏘아댄다. 그 목표가 제대로 설정된 것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 인생 최대의 목표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과녁이 옳든 그르든 든 상관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과녁을 설정해 놓고 혹시 의미 없는 화살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인다. 이미 쏘아놓은 화살이다. 아무도 그 날아가는 화살을 붙잡거나 붙잡아 방향을 틀 수는 없다. 혹시 과녁이 사라지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화살은 계속 쏘아야 한다.

 

우리의 시가 화살을 쏘는 방향은 어디일까. 우리 시의 목표야말로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과녁이 설정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과녁이 실재하지 않아 목표도 없는 곳을 향해 화살들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시에 있어 정해진 목표나 과녁이 분명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 시의 미래는 어쩌면 무작정 열려있는 것이고 그 안개 낀 미래 속에서 어느날 명중된 과녁이 신비롭게 정체를 드러낼 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그 날이 오기만 한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아니면 태평양 바다 속에 빠진 바늘 하나도 결국에는 찾아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태평양이 있고, 빠진 바늘이 있으므로, 언젠가는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오늘의 과학적 신념일 것이다. 그럴까. 시에도 분명한 논리적 신념에 입각한 과녁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문제는 시의 과녁이 아니라 화살을 쏘아대는 사대射臺에 있을 수도 있다. 시의 화살은 어디로가 아니라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음악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시의 화살은 사대射臺 역시 음악이나 그림과는 다르지 않을까. 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잘난 생각에서 한 발 물러선다면, 시 역시 문자라는 제한된 사대射臺에서 화살을 쏘아야 하는 특정 예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정신은 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 예술은 물론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시인은 자신의 사대射臺에서 좀 더 겸손한 자세로 화살을 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진지하고 치열한 자세로 화살을 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시의 설자리를 돌아보며 근본적인 시의 얼굴을 점검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마구 쏘아대는 시의 화살이 오늘도 안개 너머에 산처럼 쌓인다. 세월이 흘러 만약 언젠가라도 안개가 걷히는 날이 온다면 당연히 보일 것이다. 무수한 시의 주검들, 이 주검들로 시는 과연 무엇을 얻었던 것일까.

 

이번호부터 삼행시와 시노래를 기획물로 싣는다. 우리시의 운율과 시의 노래성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시조라는 정형시와는 별개로 잃어버린 우리시의 리듬을 찾아 시대에 맞는 시의 최소한의 정해진 틀은 가능한지 점검해보고, 시라는 특정 장르가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음악성을 시노래로 과연 접근해 갈 수 있는지 타진해 볼 것이다.

 

 

□ 장종권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이사장. 계간 《리토피아》 편집인 겸 주간

http://seoultoday.kr/homepage.php?minihome_id=j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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